이름붙일 수 없는 색에 대해


이선영 (미술평론)

 

장철원의 작품들을 전시공간이라고 약속한 곳이 아닌데서 본다면 그것이 미술작품일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티언스 대전’은 과학기술과 예술의 상호작용적 대화를 추구하는 전시지만, 그의 ‘작품’들은 색과 형태에 관한 시지각적 실험을 위한 장치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에 자신의 연구를 추동하는 수수께끼같은 예외적 현상이 필요하듯, 작가들이라면 직관에 의해 만들어진 수많은 경험치들을 한데 모아 분석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할 것이다. 장철원의 작업은 후자에 해당된다. 전시장 초입에 있는 작품 [무지개 나누기]는 캔버스에 아크릴로 칠해진 12가지 색상의 반복 이미지를 보여준다. 육안으로 본 이 ‘기하학적 추상회화’는 무지개를 연상키는 색상으로 칠해져 있다. 암실에 들어온 빛에 프리즘을 통과시켜 무지개 색으로 분해시킨 최초의 과학자는 뉴턴으로 알려져 있다. 무지개 색은 실험실의 조건에서 조각조각 나뉘어져 분석되기에 이르렀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색의 수수께끼]에서 당시 뉴턴이 이룩한 성과는 자연 현상을 쪼개고 수치화하여 다시금 짜 맞춤으로써 자연현상을 정확히 분석하는 새로운 모델의 발전이었다고 본다. 장철원은 관객들에게 그 앞에 놓아둔 스마트폰 모양의 아크릴판으로 무지개 색 그림을 보게 한다. 이 간단한 장치를 통해 한눈으로 다시 본 그림은 무지개색이 아니라, 빨강, 노랑, 초록 같은 단색들로 나타난다. 무지개 색 자체가 분석적인 색인데, 또 다른 장치가 개입되면서 더 순수하게 환원된 상태의 색을 드러난다. 그 다음 작품 [CMY에서 온 별]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투명판 위에 인쇄된 색/형태를 통해 빛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확장했다. 관객의 육안이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라서, 색 또는 빛의 혼합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이에 대해 잉크는 원래 감산혼합인데, 투명한 장치를 통해서 빛과 같은 가산 혼합의 결과를 얻었다고 말한다. 

 

작품 [두 프레임]은 두 종류의 직선이 겹치면서 서로 간섭작용을 일으켜 곡선처럼 보이는 효과를 준다. 빨강과 녹색의 직선이 혼합되는 곡선은 ‘므와레 효과’로 알려진 착시의 결과이다. 실험이란 본래 유의미한 차이를 감별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구성요소의 조합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며, 제3자가 재현해도 같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보통 예술은 그 반대로 여겨진다. 기준이 있다면 기준을 벗어나는 것이 예술이다. 그러나 기준이 없다면 예술은 새로운 기준을 만들기도 한다. 또는 새 기준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유지되는 물마루는 매우 짧다. 과학은 재현적이다. 재현을 추구하는 한 예술 또한 과학적이다. 미술사는 과학자와 예술가를 병행했던 천재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한 천재들도 인생 후반기에 가면 (과학적으로)코드화 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빛을 분해했던 뉴턴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실체 그 자체가 바로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와 사건의 대조를 통해서 과학과 신화, 예술 등의 차이를 구별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예술은 과학과 달리 사건으로부터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과학은 구조로부터 시작한다. 조형예술가로서 장철원은 색이라는 조형의 근본이 되는 현상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보았던 수많은 명화들의 그 이름붙일 수 없는 색들의 정확한 분류 방식을 알고 싶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색을 잘 못 쓴다’는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과제도 있었다. 그가 근 몇 년 동안 골몰했던 과학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주제는 색상의 표준에 대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협업 연구원으로 참여한 이들 또한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속의 과학자들이었다. 그것은 결국 어떤 현상에 대한 명확한 정의(또는 명명)라는 점에서 철학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또한 누가 기준을 설정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담론과 권력의 관계’(미셀 푸코)도 생각하게 한다.

 

장철원이 그 문제에 수년간 지치지 않고 몰입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비록 만족할만한 대답을 아직 얻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에서 파생되어온 성과물들이 있게 마련이다. ‘색상의 표준은 무엇일까’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질문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흉내 내면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색은 색이 아니다’는 화가들의 경험을 갖다 대는 것은 맹목적이리라. 작가는 이전 작업에서 수 십 가지 물감을 칠해서 색 계측기로 측정하여 색상 표준을 구하기도 했다. 물감이라는 물질 덩어리를 포함하는, 변수가 많은 실험에서 작가는 색의 기본 입자들이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작용한다는 것, 그리고 측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상대적이라고 해서 결정 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정은 인과적이 아니라 확률적이다. 뉴턴의 패러다임을 벗어난 현대과학 또한 확률에 의존함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색을 과학 기술적 차원에서 정의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못하다. 작가에 의하면 ‘색은 빛과 관련되어 있고 빛은 파장으로 정의’되는데, 그것을 인식하는 육체적 수용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작가의 조사에 의하면, 약간 타원형인 지구에서는 태양의 조건이 지역마다 다르다. 무엇보다도 색은 그자체로 홀로 등장하는 법이 없다. 색은 맥락에 따라 다르다. 또한 색은 물감을 원료를 포함하여 물체와 결합한 상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수많은 변수에 노출되어 있다. 색에 관한한 상수는 없고 변수만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이 색의 매력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에서 새로움과 다양성도 생겨난다. 모든 것이 시스템화 되어 가는 현대에 혹자는 이러한 영역에서 인간적, 그리고 예술적 자유를 찾을 수도 있다. 의미와 연결될 수 있는 형태에 비해, 색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다. 화가의 무기는 형태(의미) 보다는 색채(형식)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인간의 육안을 기준으로 할 수는 없다. 이제 인간의 환경 또한 그 이전 시대에 인쇄물이 그랬듯이 수많은 디스플레이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고, 그 시스템에는 각각의 기준이 있다. 숫자를 입력하면 정확한 색이 나오는 식이다. 그러한 의미의 ‘객관성’은 AI를 비롯한 기계의 영역이 더욱 확장될수록 더 보편화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포함한 불확실성의 요소를 점차 없애고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현상을 보다 확장하는 것이 시스템의 목표일 것이다. 인간의 영역에 속해 있던 많은 불투명한 것들이 근대 이후 계몽의 빛 아래 차츰차츰 투명하게 드러났다. 계몽주의 기획은 어느 시기에 끝난 것이 아니라, 기계가 몸과 정신의 안팎을 더욱 촘촘히 감싸 안는 시대가 도래 하면서 더욱 힘을 발휘한다. 프린트한 OHP필름으로 이루어진 장철원의 [레지던시 일기]는 5개월간의 작업 단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투명 프린트물들은 서로의 간섭작용에 의해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아티언스 대전 프로그램이 시작된 때부터의 기록물이고, 색상의 표준을 구하려는 작가의 시도와 이를 이용한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을 텐데. 작가는 그것을 읽기보다는 단지 보기를 원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채웠던 수많은 층위들은 확인된다. 그것은 덩어리로 보이지만, 읽으려는 의지를 가진 이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들춰내고 뒤에 뭔가 밝은 것을 받쳐서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르다. 본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본 것을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더 나아가 재현, 또는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은 사물의 붙투명성을 투명하게 기호화하는 과정이다. 현 세상은 이전 세상보다 더 많이 투명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투명성이 세계를 더 다양하게 하고 인간을 더 풍요롭게 해주었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장철원의 작품/연구는 색상을 포함한 불투명한 현상들을 투명하게 이해하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그것은 경계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가능한 경계를 확정지어 나가는 지난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수 많은 도형이 활보하는 공간, 프랙탈 세계


문선아 (독립기획)


장철원의 작업의 모체는 자연이다. 그의 작업은 세상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관찰은 이내 '시시각각 변화하는 불규칙적인 움직임 속에서 과연 패턴이라는 것이 존재할까?'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오렌지에는 핵이 있진 않지만, 잘라보면 단면의 알맹이들은 중심의 어떤 지점을 향해 몰려있는 듯하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열매의 모습을 유지하기위해 서로 비슷한 관계나 형상을 취하고 있다. 자연의 패턴이자, 놀라운 원리다. 작가는 이 원리를 구현해내기 위해 도형을 이용한다. 벌집하면 육각형, 해바라기하면 피보나치수열이 연상되듯, 도형이야말로 자연의 형상을 대변하고 있는 상징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작업방식은 이렇다. 주변의 자연이나 사물 등을 관찰하여 그 대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모양들을 추출하고 디지털 그래픽 툴을 이용해 균형적이고도 단순한 형태로 완성시킨다. 그리고 이 조합을 회전 혹은 중첩시켜 '구성의 균형'을 지닌 특정한 유기적 형상을 만들어낸다. 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개체 이미지는 단순함을 기반으로 했으나, 꽤나 복잡한 구조를 띤다. 장철원은 여기까지의 과정을 제작이 아니라 조합이라고 칭한다. 삼각형과 역삼각형을 중첩시켜 다윗별 모양을 만들어 낸다고 하지만 누구도 그 형태의 원작자라고 말할 수 없듯, 작가가 일차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 역시 자연 속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

하여 작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자신이 만들어 낸 (그러나 작가의 말에 의하면, 분명 우주의 어딘가에 존재하거나 존재할) 이미지에 수공적 물성을 부여한다. 하나의 의식처럼, 직접 연필을 정성스레 깎아, 머릿속과 컴퓨터 안에만 존재하던 이미지를 지금, 눈앞의 현상에 있는 캔버스 위에 드로잉 해 낸다. 직선이 여러 개 모여 도형을 형성하고 또 다시 도형들이 모여 하나의 개체를 이뤄내는 과정을 연상하며 레이어를 쌓아 구조적 이미지를 캔버스에 구축해내는 일은, 사실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다. 면을 분할해 직선과 직선이 만들어 내는 공간은 조금만 실수를 해도 전반적으로 틀어져버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가가 묵묵히 정교한 드로잉을 완성해 가는 것은, 일종의 작가적 수행이다.

작가의 작업은 '기하학에 기반 한 직관'을 전제로 한다. 기하학에 대한 관심은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간 계기로 증폭됐다. 시차를 반복해서 생각하다 보니 시계바늘이 이루는 각도가 영국과 한국사이를 잇는 공간적 도형 개념으로 확장됐다. 견고하고 유기적이며,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기하학은 이제 더 이상 수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작가에게 자연과 기하학은 대립되는 이분법적 구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유하는 것이며, 자연의 질서이자 원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매체가 된다. 단순한 하나의 도형에도 무한한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고, 동시에 자연의 숭고함이 서려 있다.

최근 작가는 첫 개인전을 통해 작업들을 정리하고 관람객들에게 선보일 기회를 가졌다. 섬세한 수작업을 통해 그려낸 [Macro and Micro]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자연의 숭고를 관람객들에게 오롯이 전달한다. 작은 도형이미지의 중첩이 거대한 자연의 구조를 건축해내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은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구조를 동시에 지시한다. 기존 작업의 일부분의 구성을 확대하여 다시 그린 새 작업들은 기하학이 비트맵 이미지(bitmap image)에 기반 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 백터(vector)의 방식에 기인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미지를 확대해도 점선면의 기본적인 요소가 쪼개지지 않는 벡터의 방식에서 우리는 이성적 사고의, 더 나아가 자연의 무한함을 느끼게 된다.

그의 작업은 자연과학에서 단순한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복잡하고 묘한 전체 구조를 만드는 '프랙탈(fractal)'이라는 자연과학 개념을 연상시킨다. 미시적으로 축소됐다가 거시적으로 확대되기도 하는, 잘게 쪼개도 그 안에서 또 다시 같은 구조가 무수히 형성되는 프랙탈은 순환과 영속의 구조를 지닌다. 이 이론의 결론은 '우주의 모든 것이 프랙탈 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인데, 이론을 따른다면 결국 작가는 손으로 우주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평면회화 속 도형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영상 작업 외에도, '인연의 끈'을 모티프로 삼아 사람들의 관계를 유기적 패턴으로 설치해보고 싶다는 작가는, '설계도'가 탄탄하게 준비되어야한다고 생각하기에 한동안은 평면 작업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그러나 모든 아이디어와 정보를 꼼꼼히 기록해 놓은 작가의 다이어리를 보며, 그의 작업이 평면을 벗어나 3차원으로 확장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