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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살던 곳은 창호문이 있는 집이었다. 방에 앉아 문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때로는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바깥을 바라보곤 했었다. 당시의 창호문은 바깥을 바라보는 창이기도 했고, 안과 밖을 경계 짓는 틀이기도 했다. 문살의 이미지는 매우 단순했지만 정교한 규칙을 지니고 있었다. 서까래, 마루, 기둥, 벽, 담, 이층장 등도 창호문처럼 비례와 대칭, 선의 반복이 있는 그리드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각인된 공간적인 이미지들은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는 하나의 매개자처럼 느껴졌다.

​하루는 오렌지의 단면을 관찰해 본 적이 있다. 각각의 알갱이들은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배열되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중심을 향하여 구를 이루는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씨앗이 있는 사과나 체리와는 달리 눈에 보이는 구심점(핵)은 없었지만, 오렌지는 오렌지만의 고유한 구성으로 하나의 구를 완성하였다. 이런 점에서 오렌지는 작은 지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형(球形)이라는 가시적인 형태의 유사성 외에도, 응집된 구성 요소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개별적인 모양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알갱이들이 하나씩 모여 완전한 오렌지가 되는 것처럼, 아주 복잡해 보이는 사물도 단순해 보이는 원자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원자를 비유적인 다이어그램으로 나타내면 삼각형이나 원과 같은 간단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사물의 최소단위를 대변하는 각각의 도형들은 저마다의 모양, 크기, 거리와 각도를 가지고 있고, 한 화면 안에서 유기적인 구성의 방식에 따라 서로 중첩하며 또 하나의 개체를 만들어 낸다. 어린 시절 작은 공간 안에서 바라보았던 기하학적인 이미지들과 사물을 관찰하며 그 구조의 형태를 공부했던 것처럼, 경험과 학습을 통해 습득한 수학적인 기호들은 작업의 기초가 되는 생각들을 확립한다.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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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원소이지만 그 원자의 수와 배열에 따라 다른 성질의 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평면에서도 동일한 도형의 수와 그 배열에 따라 다른 형태의 이미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세모를 닮은 도형을 여러 개 그린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을 재배치해서 하나의 모듈을 만들고, 모듈을 움직이면서 궤적을 주기적으로 기록한다. 모듈이 정지하면 이미지는 완성된다. 움직임의 궤적을 세분화할수록 이미지의 개수는 늘어난다.

세모를 닮은 도형이 파생한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가장 알맞은 형태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왜 내 눈에 알맞게 보였을까? 가장 이상적인 이미지를 그림으로 구현했을 때 어떤 왜곡이 발생하는가? 그 과정에서 평면회화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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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하나의 프린터라고 여기며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이 프린터는 정교하지 않은 프린터이다. 때론 손 떨림이 발생하거나 정해진 범위 밖으로 벗어나기도 한다.

그림을 아무리 정교하게 그리려고 해도 드로잉머신(로봇팔)보다 내 손이 더 정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노력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선의 자유로움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다. 선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은 길이와 방향 이외에도 그것을 그릴 당시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굵기와 농도, 속도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정교함에서 벗어난 그림일수록 무질서하게 다양해질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 나는 그 사이의 중간지점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지나치게 무질서하지 않으면서, 정교하지도 않은 그림. 오렌지의 단면이 멀리서 보면 규칙성이 있어 보여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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